이제야 좀 원래 의도대로 

분위기가 가벼워지고 있네요_






※언제나 캐붕주의

※동화풍 판타지같은 느낌이 가미된 수인물입니다. 

   - 쿠로오: 고양이과 수인 / 츠키시마: 인간 

※약 9,700자 분량입니다.














02. 도둑고양이






 츠키시마의 흐느낌은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어 그 하얀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억울함, 막막함, 슬픔등 모든 안타까운 감정들이 그득히 담겨있을 것이었다. 


 한참 뒤, 늦은 밤이 되어 높았던 보름달도 기울어갈 무렵. 그제서야 츠키시마의 울음소리는 잦아들었다. 본인도 모르는 새 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숲에는 색색거리는 가벼운 숨소리만이 조용히 들려왔다. 여러가지로 고된 하루였으니 지쳐 잠드는 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쓰러지지 않은 것이 대단했다. 

 차가운 바람이 츠키시마의 코트를 흔들었다. 매정한 바람에는 배려가 없었다. 추운 밤공기에 웅크려진 그 굽은 등이 안쓰러워 보였다.


 츠키시마가 잠이 들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조용하던 숲에서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에 취한 츠키시마는 느끼지 못했지만, 캄캄함 속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는 그 자체로 충분히 공포스러웠다. 간간이 부엉이 소리도 들리는 것이 더욱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잠시 구름에 가렸져있던 달이 어느 곳을 비추자, 곧게 선 나무 뒤로 검은 인영이 어른거렸다. 그 실루엣을 보아하니 키도 크고, 덩치도 꽤 있어보였다. 분명 마을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터인데 이상할 따름이었다. 


 숨어있던 나무에서 나온 검은 인영은 살금살금 츠키시마에게로 다가갔다. 새근거리며 자고있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여기저기를 살펴보더니 입고 있던 제 옷을 벗어 츠키시마에게 덮어 주곤 번쩍 그를 안아올렸다. 

 츠키시마가 작은 키가 아니었음에도 무리없이 들어올린것을 보니 평소에도 힘 꽤나 쓰는 사람인 것 같았다. 공주님안기로 그를 안아 든 검은 인영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둘의 모습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구름에 가렸던 달이 다시 이곳을 비췄을 땐 두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




 다음날, 츠키시마는 뻐근한 전신의 근육통과 함께 모르는 방에서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더듬더듬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있던 안경을 집어 끼었다. 방안이 환한 것이 벽에 난 창문에서 아침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걸터 앉아 주위를 살폈다. 


 방안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듯 했는데, 가구라곤 침대와 작은 테이블, 조명 하나뿐이라 어질러져 있는게 이상하긴 했다. 그리 좁지 않은 방인지라 자칫 휑 해보일 수 있는 인테리어였지만, 네모난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아이보리색 벽지가 따뜻한 분위기로 그 빈 공간을 채워주고 있었다.


 노란 햇볕을 느끼며 가만히 앉아있자니, 불현듯 어제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비몽사몽했던 정신이 갑자기 확 깨어났다. 불타버린 마을, 사라져버린 사람들. 우울한 기분이 뭉글뭉글 솟아올랐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이 다시금 츠키시마를 덮쳐온 것이다. 막막하기만한 상황에 머리가 아팠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피할 수만은 없었기에 복잡한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 해보려 노력했다.

 


 마을이 불타버리긴 했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죽거나 다친 사람조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형도 없었으니 아마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사히 피난해있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이를 정확히 판단하기엔 츠키시마 자신이 가진 정보량이 턱없이 적었다. 그저 형의 죽음을 보지 못했으니, 죽지는 않았겠거니 막연히 바라는 것이었다. 


 일단은 형의 행방을 찾는 것이 일순위였다. 하나뿐인 집과 마을이 없어졌지만 그런걸 걱정하는건 지금 상황에서 사치스러운 고민에 불과했다. 더 이상 대책없이 우는 건 어제부로 끝이었다.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으니 희망적인 쪽에 걸어보기로 했다. 

 평소 츠키시마의 부정적인 성격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지만, 누구든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것이 당연한 논리였다. 지금은 그저 제 처지에 충실하기만 하면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그제야 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위아래 모두 편안한 잠옷차림이었는데, 흙으로 더러워졌던 겉옷은 깨끗이 세탁되어 벽에 걸려있었고 자신의 짐 또한 그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또 엉덩이에 닿는 폭신하고 넓은 침대와 보송한 이불까지. 이런 호화로운 곳에서 잠을 자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그 추운 숲에서 자신을 데려와 여러가지로 편의를 제공해준 그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눈을 떴을 때 잠이 든 그곳 그대로였다면 몸이 무사했을지도 미지수긴 하지만, 마음은 마음대로 더 심란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츠키시마가 집주인을 찾으려 몸을 일으킨 순간, 벌컥 방문이 열렸다. 문을 연 남자와 츠키시마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




 들어온 사람은 20대정도의 건장한 남성이었는데, 얇은 실내복 차림에 작은 나무 트레이를 들고 있었다. 삐죽 솟은 뒷머리와 반만 내려온 앞머리가 참 개성적인 사람이었다. 

 남자는 일어나 있는 저를 보더니 반가워하며,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리곤 물컵이 놓인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자연스레 츠키시마의 옆자리에 걸터 앉았다. 



  "오, 벌써 일어났어? 머리는 좀 어때? 밤새 열이 올라서 걱정했다고."



 남자는 스스럼없이 츠키시마에게 말을 건넸다. 열을 재본답시고 이마로 가져다대는 큰 손이 갑작스러웠다. 타인과의 스킨쉽이라곤 형과 해본게 전부였기에 츠키시마의 얼굴에는 어색함이 가득했지만, 처음 느껴보는 손길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눈치였다.



  "..괜찮아요. 여러가지로 신세를 졌습니다."


  "큭큭. 신세는 무슨! 괜찮아. 배고프지? 바로 아침밥 먹자. 간단한 스프야."


  "아,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지- 뭐, 일단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남자는 저와 달리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 같았다. 사람을 대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무엇보다 제 눈을 보고도 아무말하지 않는 것이 고마웠다. 



 츠키시마는 남자의 안내에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복층 구조로 된 나무집인듯 보였는데 생각보다 아담한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풍겨오는 분위기가 편안했다. 츠키시마가 신기한듯 여기저기를 둘러보자 남자는 자랑스럽게 제 집을 소개했다. 직접 지은 집은 아니지만 제 손 닿지 않은 곳이 없어 정이 간다고 했다. 


 부엌으로 내려오니 고소한 스프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감자스프인 것 같았다. 맛있는 냄새를 맡으니 급격하게 허기가 졌다. 



  "금방 떠줄테니까 거기 식탁에 앉아있어."


  "네."



 곧 츠키시마의 앞에 스프그릇이 놓여졌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게 식욕을 자극했다. 뒤이어 남자도 제 것을 떠 자리에 앉자 조촐한 아침식사가 시작됐다.



  "잘 먹겠습니다."


  "응. 더 있으니까 많이 먹어."



 스프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맛있었다. 허기가 더해져 그렇게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절대 맛없는 맛은 아니었다. 말없이 두 그릇을 비우고 나니 이제 조금 배고픔이 가셨다. 츠키시마가 평소 먹는 양에 비하면 포식한 셈이었다. 정신이 없어 어제 세 끼를 모두 굶은 것이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식사를 마친 츠키시마는 자신이 설거지를 하려 했으나, 아직 컨디션이 좋지 않을테니 앉아서 쉬라는 남자의 말과 함께 부엌에서 쫓겨났다. 츠키시마는 거실로 나와 얌전히 남자가 설거지를 끝내기를 기다렸다. 여긴 어딘지, 제 마을과는 가까운지, 근처에 묵을 만한 곳은 있는지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게 많았다. 




***




 잠시후, 부엌에서 물소리가 멈추고 향긋한 홍차향이 퍼져나왔다. 남자가 설거지를 마치고 차를 타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홍차를 끓이기 위해 먼저 양질의 찻잎을 준비하고, 티포트와 찻잔은 따뜻하게 덥혀둔다. 흐르는 물을 받아 100도씨에서 팔팔 끓여내고, 찻잎을 적당히 덜어 티포트에서 차를 우려낸다. 

 맑게 우러나오는 진한 오렌지색과 신선한 베르가모트(bergamot)*, 블렌드티**중 하나인 얼그레이***였다. 


 트레이에 찻잔을 담아 거실로 옮겨온 남자는 츠키시마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을 건넸다. 



  "마셔봐, 이래뵈도 차는 좀 타는 편이라 괜찮을거야."

 

  "아, 네. 감사합니다."



 츠키시마는 아직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조금씩 입에 머금었다. 몸전체로 퍼지는 따뜻한 온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입안가득 채워오는 차의 풍미 역시 생각이상이었다. 남자의 말대로 생긴 것과 달리 남자는 꽤 섬세한 사람인 것 같았다. 


 배부르고 따뜻하니 온몸이 나른해졌다. 호화도 이런 호화가 없었다. 이 감정은 고스란히 츠키시마의 얼굴 위로 솟아올라 맑게 갠 표정에서 만족감이 엿보였다. 마치 뜨끈한 욕조에 앉아 반신욕하는 표정이 이러할 것 같았다. 


 남자는 이런 츠키시마가 귀여웠는지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있었다. 어깨가 다 부들부들 떨렸다. 곧 이를 눈치 챈 츠키시마가 빨갛게 얼굴을 붉히자 남자의 어깨 떨림이 더 심해졌지만, 츠키시마는 무시하고 말을 걸었다. 



  "흠흠.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데요."


  "큽..뭔데? 나이? 이상형?"


  "..네?"


  "아냐아냐, 큭큭. 계속해."


  "..그럼 통성명부터 할까요. 저는.."


  "응, 알아. 케이잖아. 츠키시마 케이. 예쁜 이름이야. 음음-"



 알려주지도 않은 남의 이름을 말해놓고, 예쁜 이름이라며 저 혼자 뿌듯해하는 모습이 퍽 사람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쪽이 제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혹시 제 짐을 뒤졌다거나.."


  "그쪽이란 호칭은 듣기 좀 거슬리는데- 평소처럼 '쿠로오'라고 불러줘."


  "본인 이름이 '쿠로오'라는 말을 참 이상하게 하시네요. 뭐, 그런건 됐고 일단 여기가 어딘지 알고 싶은데요."


  "그런거라니...너무해..."



 남자가 상처받은 척 우는 시늉을 했지만 츠키시마는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그저 착하고 고마운 사람이라고만 여겼더니, 정신이 이상한 사람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좀 진지하게 들어주실래요? "


  "아아, 알았어. 여기는 음.. 뭐라고 설명해야하나.."


  "..?"


  "어... 다른 공간? 아니다, 다른 나라가 더 낫겠다. 여기는 케이가 살던 곳이랑 다른 나라야."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인지.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다른 나라요? 하룻밤새 국경을 넘었다는 말을 저보고 믿으라는.."


  "아니아니, 그건 아닌데.. 아, 진짜 뭐라고 해야되냐.."


  "숨기지 말고 빨리 얘기해주시죠."


  "그냥 직접 보는게 더 빠르겠다. 잠깐 눈 좀 감아봐."


  "갑자기 무슨.."


  "자, 이거 덮고 있어."



 남자가 급히 덮어씌운 담요 덕에 츠키시마의 시야가 깜깜해졌다. 무슨 꿍꿍이인지, 은인이긴 하지만 역시 좀 더 경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꼭 숫자 열 개 다 세고 담요 치워야 돼, 알았지?"


  "하아..네."



 츠키시마는 남자의 말에 따라 고분고분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여섯쯤 세고 나니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가 툭툭 떨어지는 소리였다.



  '뭐지? 다 된건가?'


 준비가 끝난건가 싶었지만 일단 약속한게 있으니 숫자는 끝까지 세보기로 했다.


  "..여덟, 아홉, 열- 이제 벗을게요."



 조심스레 담요를 치우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왠 덩치 큰 고양이 한 마리였다. 새까만 털색이 제가 아는 어느 고양이와 아주 닮아있었다. 아니, 닮은 정도가 아니었다. 나른한 생김새하며, 제가 걸어준 목걸이까지 완전히 똑같았다. 지금쯤 아카데미 뒷 숲속에 있어야 할 '쿠로오'가 여기 있었다. 



  "...'쿠로오'? 왜 여기 있어? 쿠로오씨는 어디 가고.."



 여러 궁금증이 일었지만 고양이 '쿠로오'가 츠키시마에게 봄을 부벼오자 그런 궁금증들은 쏙 들어갔다. 아카데미에 있으면 어떻고, 여기 있으면 또 어떠랴. 못 본지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렇게 보니 또 반가운 기분은 어쩔 수가 없나보다. 조금 갑작스럽긴 했지만 살풋 미소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더 해달라는 듯 애교를 부려왔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츠키시마는 사라진 남자, 그러니까 '쿠로오씨'를 찾아야 했다. 좀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나 싶었더니 또 이렇게 사람 뒷통수를 쳤다. 

 츠키시마는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폈다. 그 건장한 덩치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먼저 거실을 한바퀴 빙 돌아보며 그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고양이 '쿠로오'가 그 뒤를 졸졸 따랐다.



  "저기요- 쿠로오씨- 빨리 나오시죠."



 쿠로오씨를 부르는 목소리에 조금 귀찮음이 묻어났다. 정말 고마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런 감사를 넘어서 츠키시마는 남자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아... 숨박꼭질하자는 것도 아니고..'



 츠키시마는 부엌까지 돌아보고 나서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일단은 남의 집인지라 제가 이곳저곳 마음대로 들어가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소파에 앉으려는 순간, 테이블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옷가지가 눈에 띄었다. 조심스레 그것들을 들어올려 보니 아까까지 남자가 입고있던 옷들임이 틀림없었다.


 뱀허물 벗듯 고스란히 옷을 벗어놓은 모습에 기가 찼다. 다 큰 성인 남성이 아래위 모두 벗어제끼고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대체 저보고 어쩌라는 건지 츠키시마는 또다시 혼란에 휩싸여 멍하니 옷들을 들여다봤다.


 그 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 골똘히 생각하던 츠키시마의 머릿속에 갑자기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가능성이. 

 딱딱히 몸을 굳힌 츠키시마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서 있는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간신히 들고있던 옷가지가 툭 떨어져 내렸다.


 에이, 설마-




***




  한편, 고양이로 변한 '쿠로오씨'는 저를 찾아다니는 츠키시마를 보며 신나게 즐거워 하고 있었다. 동물형으로 변한 모습을 보고 당황한 표정하며, 귀찮음이 역력한 모습으로 제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간 재미진 것이 아니었다. 덤으로 쓰다듬어주는 츠키시마의 손길까지. 지금 '쿠로오씨'는 기분이 최상이었다.


 사실, 이렇게 기분좋은 '쿠로오씨'는 어젯밤까지만 해도 제가 저지른 일에 대해 실컷 마음을 졸이고 있던 차였다. 간밤에 불타는 욕망에 못이겨 귀엽고 사랑스런 '인간' 하나를 납치해왔기 때문인데, 그렇게 납치해온 인간이 바로 '츠키시마 케이'였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제 인생에 이보다 잘한 일이 또 있을까 싶었다.



 케이를 처음 만난 날, '쿠로오씨'는 인간세계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친우 오이카와의 부탁으로 어떤 물건을 전해주기 위해 교내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좀처럼 인간들이 사는 마을에는 잘 내려오지 않았던 터라 이것저것 관심가는 것들이 많았더랬다. 


 들어올 때 받은 손님용 출입증을 달랑달랑 목에 걸고 곳곳을 누비고 다니던 중, 한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기심이 일어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니, 적지않은 수의 학생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흠뻑 물에 젖은 한 소년이 서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그를 보며 즐거워 하고 있었고, 그 소년은 이런 일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젖은 옷을 털고 있었다. 축축한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에 눈쌀이 절로 찌푸려졌다. 인간 사회에 익숙하지 않은 '쿠로오씨'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사이 쉬는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차갑게 울려퍼졌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렇게 집단에게 따돌림당하는 것이 인간사회에선 종종 있는 일인 듯 했다. 오이카와의 말로는 이 학교에서는 유독 그 소년이 미움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눈동자색이 달라서라고 했다. 그런 시답지않은 이유로 괴롭힘이 정당화될 수 있나 싶었지만 인간들에게는 저와 다른 것을 극도로 무서워하는 이상한 문화가 있다고 했다. 

 


 제 볼일을 마친 '쿠로오씨'는 심부름값으로 오이카와의 도시락을 뺏어들고 천천히 점심 먹을 자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본교사 뒷편으로 가니 다른 건물 몇 개가 더 있었는데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없는 듯 주변이 아주 조용했다. 


 여기서 먹는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한 '쿠로오씨'는 곧 길가에 놓인 아무 벤치에나 앉아 도시락을 풀어 제꼈다. 기대에 부풀어 뚜껑을 열어보니 안에 든 반찬이라곤 순 채소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뚜껑도 탈탈 털어봤지만, 고기는 없고 왠 쪽지하나만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쪽지에 적힌 내용은 대충 아래와 같았다.



  [ 먹고 건강해지길 바라, 쿠로오짱~♡ -친절하고 잘생긴 오이카와씨가 ]



 제 친우의 앙큼한 술수에 놀아났음을 깨달은 '쿠로오씨'는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빡침에 부들부들 이를 갈았다. 그래도굶을 수는 없었기에 우물우물 샐러리를 씹어먹자 더 깊은 분노가 올라왔지만 꾹 참고 마저 밥을 먹었다. 


 먹기싫은 걸 억지로 먹으려니 좀처럼 양이 줄지를 않았다. 도시락의 반쯤을 먹었을 때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냄새를 보아하니 아까 그 소년인듯 싶었다. 

 예상치 못한 소년의 등장에 놀란 '쿠로오씨'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그런데 몸을 숨긴다는 것이 그만 동물형으로 변해버려서 주인잃은 옷가지가 바닥에 널부러졌다. 그 사이 소년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고양이가 왜 기숙사에..? 분명 애완동물은 금지일텐데, 야생 고양이인건가.."



 '쿠로오씨'를 발견한 소년은 처음 보는 동물에 대해 아무런 경계심없이 다가왔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오히려 좀 기쁜 듯 보였다. 



  "어디서 왔니? 여긴 들어오면 안돼."



 조금 꾸짖는 듯보여도 머리를 쓰다듬는 소년의 손길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쿠로오씨'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몰라 딱딱히 굳어있었는데, 그 사이 주섬주섬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 소년이 네모난 것 몇 개를 그 앞에 내밀었다. 



  "이거 먹을래? 무염치즈라 먹어도 될거야."



 이 때 '쿠로오씨'는 배가 고픈 상태였기에 눈 앞에 내밀어진 채소가 아닌 먹을 것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조심스레 한 조각을 베어무니 입안에서 치즈가 부드럽게 뭉그러졌다. 치즈를 처음 먹어보는 것도 아니었으나 시장이 반찬이라고 지금 먹는 치즈는 정말 꿀맛이었다. 허겁지겁 나머지 것들도 먹어치우고 나니 머리 위로 저를 빤히 내려다 보는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따라가니, 그곳엔 놀랍게도 '천사'가 있었다. 연노란 머리 뒤로 후광이 비쳤다. 머릿속에서 뎅뎅 종이 울렸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이렇게나 하얗고 깨끗했던가? 아니. 이 소년이 특별한 것이었다. 안경너머로 보이는 투명한 눈이 전신을 옭아맸다. 맑은 피부하며 작고 붉은 입술이 그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다. 말갛게 짓고있는 무방비한 미소에 '쿠로오씨'는 저도 모르게 심장을 부여잡았다. 천연 그대로의 표정은 정말이지 심장에 해로웠다. 



  "다 먹었어? 배고팠나 보네, 쿡쿡. 나는 케이야. 츠키시마 케이. 다음에 또 만나면 좋겠다. 여기 있으면 쫓겨나니까 얼른 돌아가, 알았지?"



 제 머리를 툭툭 쓰다듬고 사라진 하얀 천사님의 이름은 케이라고 했다. 이름마저도 귀여웠다. 이후 '쿠로오씨'의 인간계 장기투숙이 결정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게 첫 만남 후로 '츠키시마 케이와 '쿠로오씨'는 급격하게 가까워졌고, 결국은 현재의 납치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물론 츠키시마는 고양이 '쿠로오'와 '쿠로오씨'가 동일인물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했을테지만, 지금 제가 벗어놓은 옷을 보고 뻣뻣이 굳은 걸 보니 이제는 눈치챈 듯 싶었다.




***




 다시 현재 상황으로 돌아와서, 츠키시마는 자신의 말도 안되는 가정을 부정하는 중이었다. 고양이가 사람이 된다니 정상적인 사람의 상식선 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아직 간밤에 올랐다던 열이 내리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렇게 츠키시마가 혼란에 휩싸여 있는 사이, 쿠로오는 제 옷을 물어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다시 인간형으로 돌아와 느긋이 옷을 챙겨입고는 뻔뻔한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나왔다. 이를 본 츠키시마는 한층 더 혼란이 가중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마저도 귀엽다고 생각한 쿠로오는 화장실안도 확인해 보라며 자신만만하게 문을 열어 제꼈다. 씩 웃어 보인 얼굴에는 좋아하는 상대에 대한 장난기가 가득 차 있었다.









 

_continued

'03. 시장나들이' 편이 이어집니다.





베르가모트(bergamot)*귤속(屬)에 속하는 상록 관목. 시중에 판매되는 많은 향수에 베르가모트향이 들어간다고 함.

사진 출처: 위키백과사진 출처: 위키백과
사진 출처: 위키백과


블렌드티**: blended tea. 두 종류 이상의 찻잎을 섞어 만드는 차.



얼그레이***: Earl Grey. 홍차 잎에 베르가모트 오렌지의 껍질로부터 추출한 기름을 첨가함으로써 특이한 향을 내도록 블렌드한 가향차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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