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캐붕주의

※동화풍 판타지같은 느낌이 가미된 수인물입니다. 

   - 쿠로오: 흑서벌, 고양이과 수인 / 츠키시마: 인간 

※약 10,500자 분량입니다.
















03. 시장나들이







 거실에 앉아 있는 두 남정네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한 명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의 표정은 매우 심각해보였다. 


 츠키시마와 쿠로오가 대화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여기가 수인(獸人)들이 사는 나라라는 건가요."



 먼저 츠키시마가 침묵을 깨고 말을 건넸다.



  "응."


  "쿠로오씨는 제가 아는 그 고양이 '쿠로오' 였던거고요."


  "사실 고양이는 아닌데.. 일단 응, 맞아."


  "...또 저는 쿠로오씨한테 존재조차 불분명한 나라로 납치당했고요."


  "아니..뭐 납치까지는..."


  "네, 이제 다 알겠습니다."


  "오, 이제 내 말을 믿어주는거야?"



 쿠로오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까부터 미묘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만 있던 츠키시마 탓에 내심 불안해하던 차였다. 



  "네, 그러니까 여긴 사후세계인거죠? 저는 이미 죽은 목숨..."


  "아, 정말! 왜 안 믿어주는거야, 케이-"



 츠키시마의 입에서 또다시 생뚱맞은 소리가 튀어나오자 쿠로오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장장 20분을 고민한 결과가 이거라니 정말이지 실망스러웠다.



  "그럼 그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지금 저보고 믿으라고..!"



 츠키시마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큰 소리를 냈다. 쿠로오는 쿠로오대로 실망스러웠겠지만, 츠키시마는 츠키시마대로 충분히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까 보여줬잖아. 아님 한 번 더 보여줘?"



 쿠로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리카락 사이로 두 개의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츠키시마의 표정이 다시 굳어갔다. 드러난 귀는 까만털이 빽빽히 박혀 영락없는 고양이의 것이었다. 



  "봐봐. 나도 수인이라니까?"



 움찔움찔 움직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두 귀가 지극히도 잔망스러웠다. 저 큰 덩치에 고양이귀라니. 



  "...."


  "저기 무슨 반응이라도 좀 해줄래, 케이."


  "부담스러우니까 일단 그것 좀..."


  "자, 됐지?"



 도대체 어떻게 들어갔다 나왔다하는 건지 눈을 부릅뜨고 쳐다봐도 알 수가 없었다. 뭐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그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버린건지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




 서로 투닥거리기를 어언 30분이 넘어가자 결국 먼저 손을 든 것은 쿠로오의 쪽이었다. 대충 말싸움을 정리하고, 아직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벅찬 츠키시마를 위해 외출을 나서기로 했다.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집에  먹을 것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쿠로오는 아직 빨래가 마르지않아 입을 것이 없는 츠키시마에게 제 겉옷 하나를 내어주고 본인도 옷을 챙겨입었다. 시계를 들여다보니 시간이 빠듯했다. 분명 아침먹고 한 일이라곤 설거지밖에 없는데, 왜 때문에 벌써 점심이 되어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케이- 다 챙겼으면 빨리 내려와."


  "케이라고 부르는 것 좀 그만둬 주실래요. 초면에 이름은 좀."


  "우리 초면 아닌데?"


  "...."


  "하하..조금 섭섭하지만 뭐, 케이가 불편하다면 지금은 츳키정도가 좋으려나~"


  "아니 그것도 좀.. 그냥 성만 부른다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요."


  "큭큭, 왜 '츳키' 좋은데. 얼른 가자고 츳키군."


  "하아...."



 쿠로오의 장난끼 넘치는 태도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직 외출은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피로가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츠키시마가 지난 대화에서 한가지 느낀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쿠로오'란 이 남자는 타고난 능글거림의 소유자라는 점일 것이다.



 두꺼운 나무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눈이 부셨다. 노오란 햇볕이 머리위를 내리쬐고 있었다. 조금 쌀쌀한 감이 있었지만 츠키시마가 있던 아카데미나 마을과는 풍겨오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두꺼운 망토나 외투없이도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기분좋은 온도였다. 주변에 들어선 나무도 풍성한 잎사귀를 가진 것들 뿐이었다. 삭막하기 짝이 없던 하얀 자작나무, 침엽수들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포근했다. 그러고보니 늘 고양이 '쿠로오'와 만났던 큰 나무도 꼭 이렇게 생겼지 싶었다.



  "츳키- 빨리와."



 벌써 저만치 떨어진 쿠로오가 츠키시마를 재촉했다. 평소와는 너무 다른 풍경에 잠시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었나보다.



  "네. 가요."



 저벅저벅. 둘은 나란히 숲길을 걸었다. 

 신발의 바닥위로 느껴지는 흙은 적당히 촉촉했고, 맡아지는 나무향은 맑고 청량했다. 남쪽의 소설에 쓰여있던 '봄'이라는 것이 딱 이렇겠구나 싶었다. 조용한 사이로 간간이 들려오는 이름모를 새소리도 그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한편, 같이 길을 걷던 쿠로오는 숲을 만끽하고 있는 츠키시마를 보며 흐뭇해하고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츠키시마의 표정이 풀려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설명 하나도 없이 이런 먼 곳까지 무작정 데리고 온 것은 자신이 좀 잘못한 감이 있지만 후회는 하지않았다. 이제 다시는 츠키시마가 인간의 마을로 돌아갈 일은 없었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저에게 끌려온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각자의 관심사에 빠져 아무말 없이 걷다보니 금세 조금 전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울퉁불퉁한 흙길은 사라지고, 단정하게 닦인 길이 나타났다. 여기저기에 아기자기한 파스텔톤 집들도 눈에 띄었다. 사람들도 얼핏얼핏 몇 명 보였는데 별다른 건 없어보였다. 수인들이 사는 마을이라더니 역시 거짓말이 맞는 것 같았다. 아까 자신이 본 고양이귀는 무언가 속임수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츳키."



 마을 안으로 한 두 걸음 들어서자, 갑자기 쿠로오가 말을 걸었다.



  "왜요?"


  "시장가면 길잃어버리면 안되니까 내 손 잡고가."


  "..뭐라고요?"



 잠깐 잠잠하나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또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해오니 츠키시마는 어이가 없었다. 어린 애들도 아니고 성인 남자 두 명이서 하하호호 손잡고 시장에 가야될 이유가 대체 어디있단 말인가. 



  "저 성인인데요."


  "알아."


  "그럼 빨리 가시죠. 바쁘시다는 분이."


  "그러니까 얼른, 손.."


  "한 번만 더 얘기 꺼내시면 그냥 안 가겠습니다."


  "...쳇."



 싫다고 했더니 하는 말이 고작 '쳇'이라니. 정말이지 엄마에게 손 잡아달라고 떼쓰는 4살짜리 어린애가 따로 없었다.


 츠키시마는 '미운 네 살, 쿠로오씨'가 이끄는 대로 발길을 옮겼다. 쿠로오는 누가봐도 내가 정상적인 길이라고 주장하는 중앙의 큰 길을 놔두고, 굳이 늘어선 주택들 사이사이에 으슥한 골목만을 골라다녔다. 나름의 유치한 복수인 것 같았다. 얼굴 표정을 보니 조금 삐진 것 같았지만 츠키시마가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그저 츠키시마 본인이 길을 모르니 지금 의지할 데라곤 쿠로오밖에 없었기에 잠자코 그를 따를 뿐이었다.


 이리저리 코너를 돌아나오니 시끌시끌한 소리가 츠키시마의 귀를 때렸다. 밝은 시장의 활기가 벌써부터 피부로 전해져왔다. 저마다 소리 높여 바람잡이 하고 있는 상인들의 모습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이렇게 시끌벅적한 곳은 처음이라 신기하긴 했지만, 이 많은 인파를 헤쳐나갈 생각에 조금 걱정스럽긴 했다.



  "아아. 오늘도 사람 많네. 역시 손을 잡는 편이.."


  "사야될게 뭔가요, 얼른 사고 가죠. 이렇게 사람많은 건 좀 거북해서."


  "...무시냐고.."


  "쿠로오씨?"


  "..응? 아, 그래 가자. 일단 당장 먹을 것부터 사고, 바로 츳키 옷이랑 사러가면 되겠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식재료를 사고, 칫솔등 생필품도 구입을 마쳤다. 어찌저찌필요한 것들을 다 사고 나니 해가 머리꼭대기까지 올라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곧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아침에 먹은 거라곤 감자스프에 차 한 잔이 다 였으니, 이만큼 움직였으면 배고픈게 당연했다.


 양손 가득 짐을 든 쿠로오는 집에 가서 만들어 먹기엔 이미 너무 늦었으니 외식을 하자고 제안했다. 별다른 선택권이 없는 츠키시마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지금 한 음식점에 앉아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츳키, 시장구경 어땠어? 이제 내 말을 좀 믿게 됐으려나?"


  "아뇨, 다 '인간'들뿐 이던데요. 거짓말은 이쯤 하시죠."


  "제대로 본 거 맞아?"


  "하아, 아무도 귀나 꼬리같은거 나와있지 않았습니다만?"


  "당연하지! 장사같은 일하기에는 동물형 보다는 인간형이 더 편리하니까."


  "...지금 저랑 장난하시는 건가요."


  "큭큭. 표정 풀라구, 츳키군- 뭐 조금만 기다려봐."


 "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츠키시마의 말이 다 끝나기전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제대로된 설명을 들으려면 결국 또다시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였다. 한숨이 절로났다. 저는 심각한데 이 남자는 왜 이렇게 태평하기만 한지 이상한 억울함이 들었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배고프지? 얼른 먹어. 여기 꽤 맛있다고~"


  "잘 먹겠습니다."



 그래도 배는 고팠기에 츠키시마는 나온 음식을 빠르게 먹어치웠다. 원래 츠키시마는 음식은 조금만 먹는 편이었으나, 오늘 아침은 물론이고 지금 점심까지도 전에 없는 포식을 하는 중이었다. 제가 이렇게 많이 먹을 수 있었던가 하고 본인도 새삼 놀라던 차다. 평소 먹던 것들에 비하면 훨씬 제대로 된 식사이기도 했지만, 움직인 활동량이 배는 더 많았기에 시장기까지 더해져 허겁지겁 그릇을 비울 수 밖에 없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어느샌가 쿠로오는 제 몫을 다 비우고 츠키시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츠키시마가 빨리 먹긴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평소에 비해서지 절대 일반적인 평균보다 빨리 먹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후, 식사를 마친 츠키시마는 무릎위에 놓아뒀던 서비에트*로 꼼꼼히 입을 닦아내고 쿠로오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당히 계산을 마친뒤, 다시 양손가득 짐을 들고 둘은 거리로 나섰다. 오전보다는 꽤 사람이 줄어, 시장은 아까보다 훨씬 한산해 보였다. 가게 주인들은 각자 상품들을 정리하고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벌써 시간이.. 좀 늦었을지도.."



 쿠로오가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혼잣말을 했다. 오기전부터 바쁘다, 늦었다 하더니 또 그 소리였다. 대체 뭐에 늦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요?"


  "아냐, 지금 가면 살 수있을지도.. 뛰자!"



 쿠로오가 츠키시마의 팔을 잡아 끌었다. 난데 없이 붙잡힌 손목이 당황스러웠다.




***




 도망은 커녕 꼼짝없이 붙잡혀서 턱끝까지 숨이 차게 끌려온 곳은 시장과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 베이커리였다. 이곳 역시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가게 직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가게 팻말을 'close'로 돌리고 있었다. 



  "어이-"


  "어, 쿠로오씨! 오랜만에 오셨네요. 근데 지금 야쿠선배 안계시는데."



 큰 키의 남자가 쿠로오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서로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에-? 왜? 어디갔는데?"


  "아까 딸기 사러간다더니 아직도 안 왔어요. 혼자 가게 보느라 힘들었다고요."


  "아, 정말이지.. 정확히 언제쯤 갔는데?"


  "지금 한 4~50분정도 지났네요."


  "무슨 딸기를 만들러 갔나- 시장 다 끝났는데 왜 아직도 안와. 맨날 나보고 잔소리하더니 지도 똑같.."


  "빠직...누가 누구랑 똑같다고?"


  "어, 야쿠 선배!" 


  "...ㅇ...야쿠?"


 

 불쑥 또 다른 남자 한 명이 등장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쿠로오의 앞에서 그를 째려보고 있었다. '야쿠'라고 불린 이 남자는 방금 본 남자와는 대조적으로 작은 키가 인상적이었는데, 보이는 체구는 달리 꽤 성격이 있어보였다. 그 증거로 쿠로오가 순식간에 차인 제 정강이를 붙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본 츠키시마는 왠지 모를 통쾌함이 밀려와 아무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서, 왜 왔어? 아무 연락도 없이 한참을 안 보이더니만."


  "그건 사정이 좀 있어서... 뭐 쨌든 오늘 온 건 츳키 때문이지. 사실 못 온 것도 츳키때문이지만.."


  "뭐?"


  "아냐, 케이크사러왔다고-"


  "갑자기 무슨 케이크야? 오늘은 만들어 놓은거 하나도 없는데?"


  "그럼 지금 만들면 되겠네."


  "말이면 단 줄아냐..!"


  "딸기도 사왔다며? 그걸로 해줘. 아, 집에 가져갈꺼니까 포장으로-"


  "이게 진짜..!"


 

 쿠로오한테 덤비려는 야쿠를 아까의 키큰 남자가 잡아말렸다. 뒤에서 상체를 안아 들어올리니 다리가 높이 떠서 대롱거리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안쓰러웠다. 야쿠라는 남자는 얼굴이 벌게져서 이제는 저를 안아올린 남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또 쿠로오는 이를 보며 배를 잡고 웃어제끼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절대 끼고 싶지 않은 장면이라고 생각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후 상황이 어느정도 진정되고, 남자 넷은 'close'라고 써진 베이커리 안에 앉아 맛있는 케이크가 구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곳곳에서 달콤한 빵냄새가 풍겨왔다. 



  "이쪽은 누구야?"



 사온 딸기를 씻어 케이크 재료 준비를 마친 야쿠가 물어왔다. 이제 빵만 구워지면 금방이었다.



  "내 애인."


  "콜록-"



 다분히 충격적인 쿠로오의 발언에 츠키시마는 가만히 차를 마시다 사례에 들렸다. 



  "콜록콜록-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뭐야. 애 사례들렸잖아. 똑바로 얘기 안 할래!"



 야쿠가 발빠르게 손수건을 가져와 츠키시마에게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정확히는 예정이지만. 언젠가는 될거니까."


  "그럴 예정 없습니다."



 쿠로오가 또 다시 실없는 소리를 했다. 어느정도 익숙해진 건지 별로 따질 기분도 들지않았다. 그냥 무시하는게 답이었다.


 쿠로오는 야쿠한테 나머지 다리도 걷어 채이고 나서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통성명도 그제서야 할 수 있었는데, 야쿠는 현재 이 베이커리의 주인이고 쿠로오 와는 동창이라고 했다. 키 큰 남자는 '리에프'라는 이름에, 둘의 후배이자 지금은 베이커리의 아르바이트생이라고 했다) 쿠로오의 설명은 츠키시마가 인간이며,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제가 데려왔다는 것이 전부였다. 야쿠와 리에프는 인간이라는 얘기를 듣고 좀 놀라는 눈치였는데, 츠키시마는 앞으로 같이 살 거라며 쿠로오가 덧붙인 말 한마디에 정신이 팔려 그 미미한 표정변화를 알아채지는 못했다. 



  "제가 왜 쿠로오씨랑 같이 사는 건가요. 그런 얘기는 못들었습니다만."


  "그럼 갈 데는 있고?"



 흠칫. 츠키시마가 몸을 굳혔다. 늘 장난스럽던 쿠로오가 갑자기 정곡을 찔러왔다. 츠키시마가 잠시 잊고 있던, 잊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


  "거봐. 그리고 나 아니면 여기서 돌아가는 길도 모르잖아."


  "그래도 가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형. 찾으려고?"


  "...저는 형이 있다는 것조차 얘기 한적없는데.. 대체 저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요, 쿠로오씨는."


  "...."



 점점 분위기가 이상해질 무렵 오븐기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케이크가 다 구워졌다는 신호였다. 야쿠는 두꺼운 오븐용 장갑을 끼곤 능숙하게 트레이를 꺼내들었다. 그저 보기만 했을 뿐인데 달달한 냄새와 합쳐지니 그 폭신한 식감이 상상되어 입안 가득 침이 고이고 있었다. 


 사실 츠키시마에게 케이크는 여태 가장 맛있게 먹은, 좋아하는 음식중 하나였지만 가격대가 높아서 제 생일날에 조차 먹어보기 힘든 음식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갓 구워진 케이크라니. 쿠로오가 처음에 케이크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츠키시마는 내색은 안했지만 작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더랬다.


 야쿠는 구워진 케이크를 적당히 식힌 후, 생크림과 딸기로 데코레이션을 하기 시작했다. 스파츌라로 매끈하게 생크림을 다듬고, 사이사이로 딸기를 넣어 멋지게 장식하니 먹음직스러운 쇼트케이크 하나가 탄생했다. 실력을 발휘하는 야쿠 옆에서는 숙련된 그 모습을 보며 리에프는 '오오!'하며 연신 탄성을 내뱉었고, 츠키시마의 눈도 케이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곧 야쿠는 부지런히 움직여 완성된 케이크를 포장박스에 담았다. 그리고는 쿠로오에게 상자를 건네며, 여기엔 이 차가 어울린다며 곁들일 찻잎까지 알차게 챙겨주었다. 이를 받아든 쿠로오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도 잠시 용건이 끝났으면 빨리 돌아가라는 주인장의 축객령에 쿠로오와 츠키시마는 빠르게 베이커리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둘은 오후가 되어 조용해진 시장을 지나, 다시 숲에 난 오솔길로 되돌아왔다. 오면서 살핀 마을에는 이제 저녁시간이 가까워 와서 그런지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늦은 아침을 먹고 출발해 나올 때는 사방이 밝았는데, 지금은 벌써 해가 땅아래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숲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주변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까의 대화 이후 둘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나란히 길을 걷는 둘 사이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그렇지만 서로에게 어색함이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츠키시마는 아까의 대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쿠로오가 형의 일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마땅히 갈 곳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저 혼자 돌아갈 방법을 모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 애초에 여기가 어딘지도 정확히 몰랐다. 그리고 설사 돌아갈수있다고 해도 사라진 형을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아무런 정보도, 준비도 없이 길을 나섰다가는 가뜩이나 체력도 부족한 자신은 분명 아사 아니면 동사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당분간은 쿠로오의 말대로 그의 집에서 지내는게 염치없지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물론 쭉 그와 같이 지내고 싶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당분간이었다. 당분간.


 츠키시마가 어떻게 신세를 지고싶다는 말을 꺼내야할지 고민하는 사이, 쿠로오는 베이커리의 제 친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야쿠는 예전부터 그러니까 같이 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다. 눈치는 빨라서 누구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알아챘다. 그리곤 상황을 보다가 상대방이 말하기 곤란한 일이라고 판단되면 조용히 입을 닫는다. 오늘처럼. 분명 수상한 제 표정을 읽었으리라. 잠시 회상에 잠겨 살풋 웃는 쿠로오였다. 츠키시마와의 일은 어쩌피 제 뜻대로 될테니 걱정할 것은 없었다. 옆집의 새 두 마리만 입단속시키면 될 일이었다. 




***




 집으로 돌아온 둘은 잔뜩 사온 물건을 차례차례 정리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거실에 모였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지만 츠키시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여러가지로 감사했습니다."


  "아아."


  "..아까 한 말.. 정말 괜찮은건가요?"


  "음? 무슨 말?"


  "그...집에..머물러도..."



 점점 츠키시마의 말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부탁하는 자신이 염치없고, 그래도 은인인데 너무 까칠하게 대했던 건 아닐까 여러가지 생각들이 겹쳐져 알 수 없는 부끄러움에 휩싸여 있는 중 이었다. 


 쿠로오는 츠키시마가 무슨 말을 할지 다 알고 있었지만 발갛게 물들어가는 귓가가 귀여워 그냥 두었다. 빨간 귓볼을 콱 깨물면 무슨 반응을 할까 너무도 궁금했다. 전부터 느낀거지만 역시 케이는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생명체가 틀림없다.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벌어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꾹 다물었다. 


 같은 상황에 놓여있었음에도 둘의 머릿속은 이렇게나 달랐다. 동상이몽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잠시 신세를..."


  "응? 뭐라고?"


  "잠깐.. 준비가... 될 때까지만..."


  "헤에- 잘 안들리는데, 츳키."


  "...."



 같은 패턴이 한 두차례 더 반복되고도 쿠로오가 계속 장난스런 태도를 고수하자 츠키시마는 또 다시 울컥하고 말았다. 제가 이렇게 까지 화를 잘 내는 타입이었던가. 아니다. 이 남자 앞에서만 유독 감정조절이 서툴러졌다. 어쩔 수 없는 을의 입장이기에 더 머리숙여 부탁해야 하는것이 당연했지만 같잖은 자존심이 이를 못하게 했다. 도발섞인 쿠로오의 말투도 한 몫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쿠로오는 이런 츠키시마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당장에라도 튀어나오려는 마음의 소리를 막고 숨을 다시 한 번 깊게 들이 마셨다. 그리고 쿠로오에게 다시 한 번 정중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쿠로오는 츠키시마 놀리기에 한껏 심취해 있어서 계속 안들린다는 소리만 반복할 뿐이었다. 


 결국 츠키시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제 짐을 챙기러 방으로 향했다. 이 남자와 계속 있다가는 정신건강에 해로울 것 같았다. 츠키시마는 스트레스로 죽는 것보다는 육체가 힘든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며 자기합리화를 했다.


 쿠로오는 얼굴을 굳히고 방으로 올라간 츠키시마를 보며 아차한 표정이었다. 제가 너무 놀린 것 같았다. 쿠로오는 계단을 막 오르고 있는 츠키시마를 붙잡고 잘못 했다고 사과하며 집에 있어도 좋다고 했다. 아니, 오히려 있어달라고 자신이 애원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지만 츠키시마는 이미 기분이 상해서 별로 동하지 않아보였다. 쿠로오는 안절부절하며 츠키시마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성인 남자 둘이서 반쯤 껴안고 있는 자세는 그리 보기 좋은게 아니었다.



  "이거 놓으시죠."


  "아니..츳키.. 내가 미안.. 가지말고 있어. 여기 평생있어도 괜찮다고?"


  "제가 싫습니다. 그간 신세 많이 졌습니다. 짐가지고 바로 나가겠습니다."


  "이제 저녁먹을 시간인데 어딜 나간다는 거야- 내가 미안하다니까."


  "아뇨. 쿠로오씨는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없는데요. 그냥 제가 나가면.."


  "아, 그래. 츳키, 아까 사온 케이크도 못 먹었잖아? 야쿠네 케이크 엄청 맛있다고?"


  "...케이크요?"



 츠키시마의 목울대가 기대감으로 살짝 출렁였다. 쿠로오가 이를 놓칠리가 없었다.



  "응, 케이크. 무려 딸기 쇼트케이크라고?"



 이때다싶은 쿠로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츠키시마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승부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츠키시마는 슬며시 계단을 오르던 발을 돌렸다.



  "...절대 케이크때문에 그러는거 아니니까요. 착각하지 말아주세요."


  "큽- 알았어. 얼른 내려와. 저녁밥 먼저 먹자."



 쿠로오는 크게 웃음이 터질뻔한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여태 본 케이의 표정 중에 이번 것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묘한 수치심에 목덜미까지 달아올라 태연한척 말을 건네는 그 모습이 코피가 터질 만큼 귀여웠다. 제 사과와 애원이 케이크보다 못한 것가 하는 억울함도 있었지만 그런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케이를 납치해온 자신이 그 어느때보다 자랑스러운 쿠로오였다.

  




 






_continued

[ 04. 새 친구 ]편이 이어집니다.





 


서비에트*: 천이 아닌 종이로 된 일회용 냅킨. 캐나다에서는 아예 냅킨 대신으로 쓰는 단어이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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